기고] 막걸리잔에 흐르는 컴퓨터 시간들-김봉길시인,칼럼니스트
기고] 막걸리잔에 흐르는 컴퓨터 시간들-김봉길시인,칼럼니스트
  • 코리아일보
  • 승인 2022.02.2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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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시 김봉길기자 (c)코리아일보
블록체인 시 김봉길기자 (c)코리아일보

 

2022년 초, 오래된 친구와 술잔을 가운데 두고, 생리에 맞지 않는 디지털화폐 한두 단어 막걸리에 섞어 따르며, 동문서답 하듯, 서로 묻고 답하며 함께 웃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흰 머리도 주름도 늘고, 그래, 어디 더 아픈 데는 없느냐고.’ 
그가 대답했다. 뭐, 그날이 그날이라고 했다. 산책 좀 하다가, 누굴 좀 만나 차 마시고, 좋으면 저녁 겸 반주도 하고.
막걸리 한 모금 마시고, 또 물었다. 재미있는 일이 좀 생겼냐고, 생길 거 같으냐고. 그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세상 재밌는 일이 뭐 있겠냐, 가족 건강한 거 느끼면, 그거면 된다고. 최근, 누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퇴원해 치료해도 된다며 어제 축하 겸 저녁을 했다.”
그의 입가엔 마른 웃음이 막걸리 향보다 더 오래 남았다. 
“그래 맞아!”
맞장구치듯, 나는 그보다 조금 더 멋지게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멋쩍은 웃음이 몇 번 지난다. 서먹해진 시간을 깨듯, 또 물었다. 지폐가 없어진다는데, 그런 말 들었냐고. 친구 대답이 빨랐다. 
“돈 구경해 본지 오래됐다. 길에서 동전 본 적 있는데, 밟을까 말까 하는 사이 그냥 지나쳤다. 요즘, 신용카드로 다 결재하잖아.” 
그의 말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만만했다. 괜한 대답을 억지로 하게 만든다며 말 중간중간이 시큰둥하다.
“야, 그런데, 지폐가 컴퓨터 속 숫자로 바뀐다는데?”
이번 물음에 친구 대답이 순간 멈칫거렸다. 
“이젠, 은행에 있는 현금 대신, 디지털화폐 지갑에 있는 비트코인 같은 것을 현찰 대신 신용카드에 충전해 쓴다.”
몇 마디 더하자, 친구 입술이 꿈틀거리며 말했다. 
“뭐, 그거야 그렇겠지!” 그 말끝에 꼬리를 달았다. 
“조금 있으면, 신용카드 대신에 암호화폐 앱으로 결재한다고…” 
“험, 험, 허, 그것 참.”
내 말의 꼬리를 서둘러 자르듯, 친구는 억지로 다가오는 시간이 싫은 듯 헛기침 흉내를 냈다.

누구와 있어도 언제나 그랬다, 맞다, 시간은 항상 흐른다. 다가올 시간 위에 내 생각을 얹히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매번 그러거니와, 살아있는 생동감이 넘친다. 몸에서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과연 새로운 시간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난 친구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같은 것을 또 묻고 답하기를 되풀이한다. 
새삼 뻔한 자문자답을 속내로 이으려 하니, 순간순간마다 뭐뭐뭐라며, 억지 변명거리가 서둘러 튀어나오려 했다. 참 부끄럽게도, ‘시간’이나 ‘존재’란 단어를 향하고 있는 게 ‘나’란 단어도 철면피한이 된 모양이다. 이러한 단어들이 막걸리잔을 타고 가고 오고, 오고 가고, 뭐 그랬다. 물론 지구가 돌고 있어, 그 지구 위에 내가 움직거리고 있어, 아니 움직이고 있어야 하니, 새로움이 샘솟는다고도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보다 2배 넘는 주량의 친구가 막걸리잔을 비웠다. 막걸리를 졸졸 따르며, 잔에다 독백하듯 말도 함께 섞어 채웠다. 
“모든 언론이 머지않은 시대에 사람과 컴퓨터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변한다고 하네. 참 무서울 정도로 변화가 빨라.”
머지않은 가까운 미래라면, 몇 년을 잡으면 될까. 시간이 정지된 듯한 산, 바다, 들판 깊숙한 곳에선 10년이나 100년이나 다를 바 없이 느껴질 거다. 반대로 빌딩과 신호등으로 가득 찬 도심은 일, 주, 월 단위가 달력 칸칸 빼꼼한 낙서로 시간이 뭐 지웠다 썼다 하는 물건 취급당하기도 하리라.
친구는 뭐 그리 목이 마른지 서둘러 잔을 반이나 비웠다. 비우며, 아마도 이렇게 외치리라. 
‘사람마다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아이에게는 빠르게, 노인에게는 늦게. 아니, 움직이지 않거나 걷는 사람에게는 느리게, 뛰거나 차나 비행기에 탄 사람은 빠르게. 아니, 아니, 시계를 보는 사람에겐 빠르게, 안 보는 사람에겐 느리게. 아니다, 이도 아니다. 그냥 누구에겐 늦게, 다른 이에겐 빠르게, 그래 이게 맞을 거다!’
친구와 막걸리잔을 부딪치자, 쨍하는 소리와 함께 친구의 마음이 내 귀에 한꺼번에 흘러들었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열러 시간을 확인한다. 어느새 나는 컴퓨터가 표기하는 시간을 보며 살고 있었다. 
“너도 시계가 없지? 배꼽시계면 됐지, 뭐 컴퓨터 시계를 보냐?”
핸드폰 시간은 가짜라는 듯, 핀잔 주듯, 친구 목소리가 높다. 난 뭐라도 들킨 듯,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그래도 뭐, 컴퓨터 시계가 더 정확하다!” 
참 변명거리치곤 궁색하다. 그런데, 창피하지가 않다. 뻔한 거니까.
핸드폰이 쓴 뻔한 시간을 보다가, 다시 누가 걸어온 말이 있는지 SNS를 확인한다. 카톡, 트위터에 페이스북 메신저, 그리고 이메일까지 하나둘셋 세듯 들여다본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친구도 핸드폰을 열었다 닫는다. 아마도 이럴 땐, 그나 나나 시간이 같을 거란 생각을 했다. 괜히 뻔한 것을 확인하는 지금이야 같은 심정일 테니 말이다.

뭐가 민망한지 모르지만, 그냥 막걸리 잔을 만지작거리던 침묵을 깬 건 친구였다. 
“뭐, 비트코인이든 이던지 뭔지 하는 코인이 화폐 노릇을 한다면, 그 뭐냐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고 꼭꼭 숨어 있는 현찰이 진짜 썩겠고만?” 
평소 돈을 잔돌처럼 무시하듯 하는 친구의 말이 고소한 땅콩 향이라도 들어있는 것 같이 들렸다.
“그렇겠지, 세계의 모든 자산가치가 디지털자산으로 다시 평가된다고 하니, 현찰도 다시 다시 평가의 대상이 되겠지. 그럼, 아마도 전 세계는 동시에 화폐개혁을 하는 셈이 되는 거고.”
화폐개혁이란 말에 눈을 번쩍거리던 친구는 막걸리잔을 한 모금에 몽땅 털어 넣고, 크게 자랑하듯 말한다.
“하하, 그거는 잘 되는 거로고만! 돈 자랑하던 사람들 코가 납작해지겠어. 숨겨논 돈 다 들통나는 거니까.”
“하하하! 맞다!”
분명 맞다. 숨겨 놓은 현찰을 컴퓨터 숫자로 만들어야 하니, 개인 자산이 모두 드러나리라. 그런데, 일부러 크게 웃을 일은 없다. 세금을 더 내는 그들과 나와 무슨 상관있으랴. 
그들 자산이 디지털자산으로 모두 공개되고 나면, 떳떳이 더 크게 웃으며 다닐 텐데, 그만큼 내 웃음소리는 더 작아질 텐데, 뭐 좋아라 웃을 일인가? 세상 자산이 디지털화가 될수록, 그들 숫자는 커지고, 내 숫자는 줄어들 텐데, 이 막걸리조차 마시는 횟수가 줄어들 텐데 말이다.

친구도 내 웃음 색깔이 회색으로 변한 것을 눈치챘는지, 괜한 막걸리잔만 비우고 비워댔다. 나도 슬쩍 잔을 비우자, 친구도 잽싸게 내 잔에 막걸리를 채운다. 막걸리 몇 방울이 내 핸드폰 위로 떨어졌다. 핸드폰 화면을 닦았다. 컴퓨터가 만든 시간 숫자가, 괜히 울지도 않고 껌뻑이는 내 눈처럼, 뭔가 세상이 이상하다며, 반짝,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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